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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희망과 용기를 준 한마디]평화로 가는 길

'이 둥근 세상에/ 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하지만 // 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 날로 더해갑니다 // 평화로 가는 길은/ 왜 이리 먼 가요' 이해인 수녀의 시 '평화로 가는 길'이다. 특별히 이 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종교적인 수사만이 아니라 평화를 기원하는 수녀님의 간절한 염원이 큰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블로그 이름도 이 시의 제목을 따다 쓸 정도다.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 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 /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 민주화 운동이 뜨거웠던 8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이후 민주평통과 한미평화협회, 6·15공동선언실천위원회 그리고 한민족평화연구소 등 일련의 평화단체에 관여하면서 내 인생 후반기의 화두는 자연히 평화로 집약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걸어가는 길의 지표일 뿐 결코 쉽지 않은 일임도 안다.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유럽과 중동 등 세계 곳곳의 인류에게 오늘도 '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 날로 더해 가는데 평화로 가는 길은 왜 이리도 먼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해인 수녀는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 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라며 평화가 더딘 일을 결코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 탓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한반도의 평화가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을 통해 순풍을 타게 될지, 그러나 미국이 IS와 충돌하는 것을 보면서 '평화는 평화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요한 갈퉁 교수의 말을 새삼 음미하게 된다.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희망과 용기를 준 한마디]어찌하여 낙심하는가

이번 여름 '아이스버킷 챌린지' 가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다. 루게릭병 환자들을 후원하기 위한 캠페인이다. 루게릭병은 현재 치료약이 없는 난치병인데 처음에는 손발에 힘이 없어 무기력한 상태였다가 결국 눈동자만 움직이는 식물인간으로 지내다가 죽음에 이른다. 30년 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일어나려고 하니 온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손발가락조차 움직여지지 않았다. 응급차로 병원에 실려가 여러 전문의들의 진료를 받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어 치료가 불가능했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달려가는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좌절 속에 며칠이 지났다. 나와 아내의 눈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의지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뿐이었다. 아내는 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늘 묵상하는 시편을 읽어주었다. 어느 순간 시편의 시 한절이 새로운 소망을 갖게 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이 나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꿔주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들이 한 순간 새로운 힘과 긍정적인 소망의 마음으로 바뀌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도 새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먼저 소망의 마음으로 편안함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의학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굳센 신앙이 있다면 절망도 더 큰 소망으로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희망과 용기를 준 한마디]이제 곧 지나 가리라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던 바로 그해. 숱한 머뭇거림 끝에 30년 '외길'에서 '옆길'로 들어섰다. 비즈니스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러나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사업의 'ㅅ'자도 모르는 돈키호테의 무모한 저돌성이 화근이었다. 시작부터 균열의 벼랑과 함몰의 싱크홀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발견됐다.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던 매상이 급기야 바닥을 치고 고객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을 때의 그 절망과 좌절감이라니. 만리무운, 만리 먼길에 잿빛구름 뿐이었다. 식은 재 위에 오줌을 눈 것처럼 더운 기운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생활 동안 슬프도록 가장 치열하게 산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있는 나에게 아내가 말했다. 구약성서 시대 장군의 반지에 무슨 글자를 새길까 고뇌하는 세공사에게 솔로몬이 했다는 말, '이제 곧 지나가리라.' 아내는 말했다. 지금의 혹독한 이 시련도 곧 지나갈 것이라고.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축복에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라고. 그 말은 나의 전신을 역동치게 했다. 참 이상도 하지. 숙제를 마친 아이처럼 편안해졌다. 놀라운 반전이었다.지나갔다. 그 후 나는 준엄하도록 가슴치는 이 말을 무슨 주문처럼 자나깨나 외웠다. 이제 곧 지나가리라. 그 말은 나의 들메끈의 헤진 곳을 다시 꼬고 풀어진 끈을 새로 동여매게 했다. 내 안에 내려앉은 지반을 수리하고 무너진 축대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치유였다. 구원이었다. 인생사 다 그런 것, 그 후에도 고난과 시련은 찾아왔지만 그 때마다 그 한마디는 우람찬 버팀목이 돼주었다.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희망과 용기를 준 한마디]독서하다가 죽어버리자

독서하다가 죽어버리자. 이 한 문장으로 내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을 읽다가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온전한 정신을 갖는 것이요, 지적만족의 황홀한 쾌감을 아는 것이요, 마음 속에 그 깊이와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대양과 대륙을 품는 것이요, 내 형편과 상관없이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것이니 이렇게 복 받은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내 묘비명도 '독서하다가 죽어 여기에 눕다'가 된다면. 인문 고전과 철학 고전을 읽는 일. 1000~2000년 묵은 지혜의 산삼을 먹는 일. 책 한 권에는 한 사람의 인생 30년 노하우가 농축되어 있다고 한다. 100권이면 3000년, 1000권이면 3만 년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3000년, 3만 년에 버금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깊이 깊이 후회한다. 치열하게, 지독하게 독서하지 못한 것.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독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도서관을 먹어버렸다" 라고 선언했던 에디슨을 진작 만났어야 했다. 나 자신을 살아있는 도서관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문·심·혜·두(文心慧竇). 글자 속에 깃든 뜻과 정신을 깨달아 지혜의 문을 활짝 열리게 함으로 사고의 혁명,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는데. "독서하다가 죽어버려라."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이 내게 준 저주이자 축복이다. 독서! 아름다운 경지여. 무시무시한 열정과 숨 막히는 집중이여. 사랑과 간절함으로 읽으리라. 죽을 때까지 읽으리라. 독서하다가 죽어버리리라.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절대 포기하지 말라

나는 늦은 30대에 SMU(Southern Methodist University)로,석사 공부를 위해 왔다. 한국에서 유학시험에도 합격하고, 나름대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느라고 했다. 그러나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내 영어 실력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가 드러났다. 교수의 강의를 거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과목마다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 같았고, 세미나에서 발표할 소논문 작성을 위해 타이핑을 하다 보면 밤을 새기가 일수였다. 코피 쏟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기숙사 룸 메이트 미국인 친구에게 내 사정을 얘기했더니 "힘들면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한잠도 못자고 고민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먼저 지도교수 제임스 화이트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옥스퍼드대 졸업식에서 처칠경이 축사로 했다는 세 마디 말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처칠의 말은 네버 기브업(Never Give up)이었지. 나도 이 시간 당신에게 이 말을 전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 무슨 특별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이트 교수의 그 말 한마디는 나의 가슴에 뭉쳤던 어떤 묵직한 것을 떨쳐버리게 했다.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솟았다. 다시 강의실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그 후 나는 화이트 교수의 말대로 학위를 마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네버 기브 업! 그때 그 한마디는 이민생활 39년 동안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고 힘이 되어준 금언(金言)이 되었다.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명예는 정직한 수고에 있다

'명예는 정직한 수고에 있다.' 22대, 24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G. 클리브랜드의 말이다. 1970년, 이민 초기 돈도 특기도 없는 가정주부였던 아내가 어렵사리 얻은 첫 직업이 다운타운에서 여자 옷 만드는 재봉 일이었다. 얼마 후 경험을 쌓아 자그마한 봉제공장을 차려 한 미국회사와 계약을 맺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금 1만여 달러의 수표가 들어왔다. 장부를 확인한 결과 이는 이미 수금이 완료돼 우리와는 관계없는 돈이었다. 바로 그 회사 담당자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전했더니 오래 전 결제돼 정리되었으므로 그냥 접수해 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언젠가 밝혀질 일인데 정직하지 못한 불명예스러운 비양심적인 행동은 할 수 없다며 직접 수표를 들고 그 회사로 찾아가 사장에게 돌려주었다. "당신은 그냥 쓰지 않고 왜 반환했느냐?"고 사장이 묻자 아내는 "나는 그 돈으로 잠시 행복할지 몰라도 두고두고 양심이 괴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날 이후 그 회사는 아무리 미국 경제가 어렵던 시절에도 변함없이 우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이민 생활 45년, 그렇게 정직하게 땀흘린 수고는 오늘날 작으나마 부를 축적케 했고 지금은 명예스럽게 은퇴해 여생을 즐기고 있다.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8:28) 만삭의 임신부로 유학생 남편을 따라 온 이민 초짜 시절, 부모 형제 곁을 떠나 낯선 텍사스주에서 아이 낳고 남편이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었습니다. 배로 부친 짐은 아직 도착 전이라, 등산용 코펠에 밥을 지어 먹고 브라운 하드 박스를 식탁 삼았었지요. 아이를 낳고서도 생활은 넉넉하지 않아서 남편은 밤에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내는 세탁소에서 옷 수선을 하였답니다. 그 당시 이민의 필수 코스라는 '남청여바'를 제대로 경험한 셈입니다. 같은 시기에 개척한 캠퍼스 교회인 어스틴 한인 침례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김정주 목사님께서 물심으로 도와주시고, 우리 내외의 신앙을 집중 지도해 주셨습니다.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들러서 책상 머리에서 기도해 주신 덕분에 공부 마치고 이날까지 무사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도 있고 세속적인 욕심도 생기고 때론 병마가 깃들기도 하였고, 그래서 주님을 부정하고픈 시험에 빠질 일도 있었지요. 그때마다 이 말씀을 주문처럼 외우면 기적같이 어려움이 지나가고 더 좋은 일이 생기곤 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시 파이팅을 외칠 수 있게 한 이 한마디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2014-09-21

[창간 40주년 오피니언 특집-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능동적인 삶

말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40여년 전에는 앞서 유학 간 형제들을 따라 도미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우리도 그랬다. 처음 미국에 도착한 곳은 뉴욕주 스태튼아일랜드였고 나는 도착하자마자 향수병에 걸렸다. 향수병의 여파는 컸다. 아마도 내 얼굴에는 '고민 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을 것이다. 꺽다리 여자 치프 레지던트(Chief resident)는 친절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대한, 그리고 일반적인 병원에 대한 불평을 동료 인턴에게 늘어 놓았다. 그는 타이완에서 병원 개업을 한 경험이 있는, 나보다는 훨씬 어른이었다. 내 편을 들어 줄 줄 알았던 이 동료 인턴은 "미국이 우리를 초대했다기보다는 우리가 좋아서 미국에 온 것으로 생각해"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 때 그 동료는 '능동적인 삶'에 대해 다른 말을 빌려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내 자신을 책임지는 '능동적인 삶'의 의미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다져졌고 여러 번 재조명되었다. 능동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줄어 들었다. 나 자신과 나의 일에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으니 남을 탓 할 이유가 없어졌다. 불쾌한 일이나 얹짢은 관계의 사람들을 뒤로 하는 것도 쉬웠다. 결정이 필요한 일은 시간을 끌지 않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그런 삶의 과정에서 의예과 학생 때부터 써 오던 일기는 능동적인 삶의 중요한 동반자였다. 능동적인 삶이라는 이민 생활 철학은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도록 힘을 주었다. 사회 초년병이었던 내가 얼굴에 걸고 다니던 '고민 중'이라는 팻말은 그 때 내려지고 버려졌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 팻말이 붙어 있나 생각해 본다.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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